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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경주가 낳은 신동,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송화강 2021-01-23 (토) 19:05 1개월전 91  

경주가 낳은 신동,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 “하늘 밑에서는 제일로 밝은 머리”라고 칭송받는 사상가

 양주동 - 최남선과 ‘3대 천재’로 풍류

소설가 김동리의 친형.12세때 사서삼경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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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 김정설의 초상화

 

 

 

살아있는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빛나는 양심 김지하(芝河)는 한 인물을 이렇게 평가했다.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天才)라고 생각한다.이 사람은 때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참 천재였다.”

 

김지하 시인을 움직일 수 있을만큼 영향을 준 이는 바로 凡父(범부) 김정설(金鼎卨)선생이다.

그의 존재가치는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그리고 5·16 군사정부까지 정신문화를 비롯, 국민윤리 등 대한민국 국민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그를 아는 이는 학계 등 일부 지식층 속에서 회자될 뿐 잊혀진 천재로 기억되고 있다. 


김종직 15대손이자 문학계 거두 김동리의 맏형.  일제땐 `주요 사상범`  박정희대통령 멘토로도 역할.
日서 철학공부. 칸트·노자사상 관련 저술 펴내 


범부는 1897년 2월18일 당시 경주군 북부리(현재 성건리 185)에서 김임수(金壬守)와 허임순(許任順)의 3남 1여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산 김씨 점필재 김종직의 15대손이다.

특히, 범부는 우리나라 문학계 거목 김동리 (金東理-김시종金始鍾)의 맏형이기도 하다. 그는 4세 때부터 13세까지 김계사(桂史) 문하에서 한문칠서(사서삼경) 등을 익힌 신동(神童)이었다. 

한일합병 다음해인 1911년 경주 김씨 옥분과 결혼한 그는 병약한 몸이지만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창의(倡義:의병을 일으킴)를 시도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김종직의 후손이라는 내력을 드러낸다. 반일사상이 가동된 그는 경주 남문에 격문을 붙이고 산사에 들어가 초막에서 월남망국사를 읽고 여러 가지 병서를 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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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와 김동리의 생가(경주 노서리)



19살이 되던 해(1914년) 그는 안희제가 설립한 민족기업 백산상회의 장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경도제대(京都帝大), 동경제대(東京帝大) 등에서 청강하고 일본 학자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다.

25살에 귀국한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서 강의했다.

그 후 병을 얻어 부산에서 칩거하면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성리학(性理學) 계통을 공부했다. 이 결과 1924 자신의 이름으로 `노자(子)의 사상과 그 조류의 개관`을 발표했다. 이어 `칸트의 직관형식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그리고 칸트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서울 YMCA 강당에서 칸트의 철학을 강의했다.

38살 되던 해 그는 다솔사(多率寺) 주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의 주선으로 이 절에 머물면서 일본 천태종 비예산문이하(比叡山文以下) 대승직자(大僧職者)들과 대학교수단 40여명을 대상으로 청염파(淸談波)의 현이사상강의(玄理想思講義)를 1주간 진행했다.

그러다 45세에 다솔사에서 해인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물고문,고춧가루 고문 등 고초와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주요 `사상범`으로 낙인 찍혔다. 당시 반일체제인사들의 주무대는 사찰을 근거지로 했다.  

범부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당시 그는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자 아예 집을 부산 동래경찰서 옆으로 이사했다. 

지성들이 인정한 천재이자 사상가인 범부도 자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평가한 이가 효당이다.

효당은 일제 암흑기에 동국대 이사장 및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 박영희 등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당수로 한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광복 후 승려 출신으로 첫 제헌국회의원이 됐다.

만해는 1917~1918년 이 사찰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했고, 환갑 기념으로 효당, 범부와 함께 황금편백을 식수하는 등 3인의 관계는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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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원 시절의 범부(한복 입은 이)

 

 

특히, 한국 문단의 거두 김동리는 지난 1960~1961년 이 절에서 그의 후반기 대표작인 `등신불`을 집필하는 등 다솔사는 항일운동과 문학의 태실이기도 하다. 

범부는 장남이 운영하던 경남 일광의 기와공장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그의 진가가 발휘된다.
정인보, 최남선, 한용운등과 교류하면서 국난을 논하고 민중제도에 힘썼다

부산에서 곽상훈, 김법린, 박희창 등과 더불어 일오구락부(一五俱部)를 조직해 `건국방책`에 대해 연속 강좌를 개최했다. 
1948년 서울에서 경세학회를 조직하고 건국이념을 연구하는 한편 일련의 강좌를 열었다. 그해 겨울 그의 첫 저술인 화랑외사(花郞外史)를 구술했다. 화랑외사는 그의 제자인 조진흠이 파괴된 명동의 한 구석에서 추위에 손을 불면서 구술을 받아 적어 원고를 만들었다. 이 원고는 출판되지 못한 채 보관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58년 당시 해군정훈감으로 있던 대령 김건이 주선해 해군정훈감 간행으로 햇빛을 보게 됐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국군장병의 사상 무장을 위한 교재로 활용됐다.

1950년 54세 그는 동래군에서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4년간 의정활동을 했다.

62세에 경주 계림대학장에 취임한 후 건국대에서 정치철학 강좌를 담당하면서 이 대학 부설 동방사상연구소 소장으로 겸임했다. 이 때 강의를 들은 이는 오종식, 이대휘,이종익, 황산덕, 이종후 등 현재 학계 재직 중이거나 고위 관료를 지내는 등 쟁쟁한 인사들이다.

 

63세 때 범부는 `경전(經典)의 현대적 의의:병든 현대는 동방(東方)의 빛을 구하라`는 제하의 짧은 글을 서울대 대학신문(1959년 10월26일)에 기고했다. 또 한국일보에 겨울여행기와 운수천리(雲水千里) 10회분을 발표했다. 특히 범부는 `풍류정신과 신라문화`를 한국사상 강좌에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펴내는 최고회의보에 `방인(邦人)의 국가관과 화랑정신`의 제목으로 기고했다.

이후 부산으로 다시 내려온 범부는 부산대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면서 이때에 `건국정치의 이념`이란 제호하에 정치철학적인 논저를 저술했다. 

범부는 67세 때 5·16 군사혁명 세력의 외곽 단체인 오월동지회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그의 입지가 크게 변한다. 이 단체의 의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었다. 박 의장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정치 자문을 위해 자주 청와대를 출입하기도 하는 등 멘토 위치에 있었다. 

범부는 69세 때 정경연구(政經硏究)에 `우리는 경세가(經世家)를 기대한다`를 마지막으로 집필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근대의 마지막 선비로서 한국정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나 가정사나 일상사에는 소홀했다. 사리사욕에는 소경이며 집안 일에는 외인이었다. 성격이 호방하여 두주를 사양치 않았으며 친구라면 가문 권속의 의·식·

주보다 먼저 챙기는 성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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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유리 국가 유공자 묘역에 있는 범부의 묘지 


 

`966년 12월 16일 7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사상가 범부의 영결식에는 제자였던 시인 미당 서정주가 조사(弔詞)로 `신라(新羅)의 제주(祭主) 가시나니:곡범부(哭凡父) 김정설(鼎卨) 선생(先生)`을 지어와 울면서 읽었다.

장지는 수유리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범부는 사후에도 빛난다. 

1967년 범부선생유고간행회에서 한동안 절판된 화랑 외사를 1천 부 한정판으로 나왔고,서문은 유고간행회장인 김상기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집필했다. 또 범부의 제자인 이종익 동국대 교수의 박사학위 기념논문집인 동방사상논총(東方思想論叢)이 나왔다. 이 교수는 “이 논총은 범부의 동방사상강좌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범부(凡父)와 동리(東理)는 형제간이다. 동리는 맏형인 범부보다 16살이나 아래다.

동리는 생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백씨(형님)는 동기로서는 물론 스승으로서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은의를 나에게 끼쳐 주신 분이다” “큰 형은 열두 살 때 사서삼경을 떼고 경주같이 넓은 고을에서도 가르칠 사람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신동이었다. 장성하여 서울로,일본으로 철학공부를 하러 다닐 무렵엔 천재, 혹은 이인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했다. 

엄격히 따지면 범부는 서당(書堂) 출신으로 무학이다. 그럼에도 동경제대 등 일본 굴지의 대학에서 청강할 능력과, 노자 사상과 독일 대 철학자 칸트를 평가할 정도로 출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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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철학과 국민윤리를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범부 김정설



그래서 김지하 외에도 미당 서정주가 범부 영결식 조사에서 “하늘 밑에서 제일 밝았던 머리”라며 울먹였던 것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연구하고 범국가적 국민운동을 제창한 범부의 과제는 언제나 한국인은 어떻게 살 때 가장 사람다운가 하는 것이었다.  
`문제적 인물` 범부에 대해 2천년대에 들면서 범부연구회(회장 최재목)가 집중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영남대 최재목 교수는 “범부는 박정희 정권이 사라지면서 함께 잊혀진 사상가다. 그는 박 정권의 건국철학을 구상했고, 새마을 운동의 기초단계를 초안했으며, 남한 정권의 골격인 신라-화랑정신-경주를 제안한 인물이다”고 말했다. 


 
***********************************************<경북매일/윤종현기자  2014.10.22>

 

 

범부 김정설(凡父 金鼎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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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제 때는 사상범으로 몰려 많은 고초를 치렀다.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 머무는 동안 해인사 사건에 연루되어 1년여 동안 일제 경찰의 감방 신세를 졌다.

유불선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동학에 조예가 깊었다. 일생을 야인정신으로 살면서 독서와 사색, 강의와 저술 활동을 했다. 민족재생의 동력을 찾기 위해 남들이 부러운 눈으로 서양을 바라볼 때,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근거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풍류정신을 규명하고 그것을 해석의 틀로 삼아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윤리를 세우고자 했다.

 

역시 같은 틀에서 범국가적인 국민운동의 전개를 제창했다.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계림대학 학장, 동방사상연구소 소장, 5월동지회 부회장(회장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花郞外史』, 『풍류정신』, 『정치철학특강』, 『凡父 金鼎卨 단편선』이 있다. 그 밖에 「國民倫理特講」, 「花郞과 風流道」와 같은 강의 속기록이 남아 있다.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범부문고가 설치되어 있으며, 범부연구회(회장 최재목, 선임연구원 정다운)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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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凡父) 김정설 선생 이야기

편집부 기자 / 2016년 11월 08일


10월 7일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학술 심포지엄이 있었다. ‘범부 김정설의 풍류사상과 건국철학’이란 제목으로 김정설 선생(1897~1966)의 사상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요즘같이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5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역설적으로 그 만큼 연구할 가치가 큰 분이다. 더구나 이런 분이 내 고향 출신이라니 자랑스럽다.


행사에 참석한 분들은 나이와 성별이 다양했다. 가벼운 식전 행사에 이어 5개의 주제가 차례로 이어졌다. 역사연구가 정형진 선생은 ‘한국 고대 풍류도와 통일시대’를, 김석근 선생은 ‘김정설의 국민윤리론과 건국철학’을 발표했다. 이어서 범부 선생의 연보와 제3공화국 출범에 미친 영향도 논의하였다. 


정형진은 고운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예로 들며 ‘풍류’와 ‘홍익인간’, ‘접화군생’(接化群生,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이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라 했다. ‘접화군생’은 생소한 한자말이지만 그 뜻은 소통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맞다. 편리한 교통과 다양한 SNS 수단이 있는 이 시대는 접화군생을 실천하기에 좋다. 정형진 선생은 우리 한민족이야 말로 고조선 이래의 고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고, 고유 사상을 이 시대에 맞게 적용하면 조상들이 꿈꾸던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통일된 조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직 정리중인 생각이지만 통일된 조국의 이념을 전통에서 찾아보자는 제안은 신선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위기상황이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위기 상황은 ‘지금,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니다. 범부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청년기와 장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이어진 한국전쟁 그리고 이승만 정권을 겪으면서 숱한 위기를 맞았다. 범부는 그런 엄혹한 역사 속에서 건국철학과 국민윤리를 연구했다. 새로 건국되는 나라는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그런 나라의 국민은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가?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범부는 그 답을 풍류사상과 화랑정신에서 찾으면서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탐구했다. 그는 고유사상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보편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건국철학과 국민윤리를 구상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다. 언론을 통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계몽했다. 범부의 사상에 공감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닿아 범부는 제3공화국의 지도이념 정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범부는 전통이라 해서 다 받아들이자고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전통 가운데 ‘계승해야 할 것’과 ‘계승할 필요가 없는 것’이 있다고 구분하고 ‘계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자고 했다. 전통은 ‘찾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세계 각 국은 자기 역사에서 좋은 점을 찾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그 힘을 모아 난국을 극복해왔다. 범부의 말처럼 우리도 계승해야 할 전통이 무엇인지를 꾸준히 찾고 가꾸어야 한다. 


범부는 반세기 전에 돌아가신 분이지만 그의 생각은 지금도 힘이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존감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길을 찾았다. 범부가 저술한 국민윤리특강의 한 구절이다. “수천 년 문화와 역사의 전통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가 고유한 국민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면 과연 세계성과 보편적 인간성을 가졌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것을 못 가졌다고 하면 우리가 위대한 민족이 못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은 지도자의 잘못이 크다. 그런데 상황이 어렵다고 마냥 걱정만 할 수도 없다. 역사에서 과거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던 지혜를 찾아야 한다. “범부라면 어떻게 했을까?” 범부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남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도움이 될까? 반세기 전에 범부가 했던 고민을 다시 한다. 


권은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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