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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아닌 사실로서의 치우천왕

송화강 2019-09-18 (수) 22:56 1년전 539  

 

신화가 아닌 사실로서의 치우천왕



1) 모두 ‘하나’가 되는 감동을 받았다.


전번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붉은 악마’ 응원단은 용케도 치우천왕을 한국축구의 상징으로 끌어올려, 그 깃발아래 선수도 응원단도 시민도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감동을 만끽하게 하였고, 한국축구의 ‘4강 신화’를 창출했다.

만약 치우천왕 깃발위에 ‘금오’가 날아들었다면 4강신화가 아니라, 월드컵 ‘우승신화’가 창출되었을 것이다.



2) ‘청구나라’는 도의의 나라였다.


치우천왕의 ‘치우’는 천자(天子)의 뜻이다. 치우천왕은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우리 건국신화의 맥을 이었으며, 치우천왕은 신시(神市)시대 배달나라의 제 14세 자오지 한웅으로서 청구(靑丘)나라를 처음 세운 임금이다.

청구나라는 우주 자연의 이치와 그 움직이는 기운을 사람의 마음속에서 통합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삼신일체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의 교화와 덕치의 길을 펼쳐 나갔다.

그러므로 이웃나라 사람들은 ‘도의의 나라, 곧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칭송했다.

그들은 우리 선조들을 ‘큰 활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 곧 동이(東夷)’라고 일컬어 우러러 보았다.



3) 치우천왕은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으로 사후에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아울러 치우천왕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쇠로 투구를 만들어 썼으며, 백전백승의 용맹을 떨쳤으므로 오랫동안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다.

그래서 고대 지나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도 전장에 나갈 때는 그 분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인들은 훨씬 후대에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를 군신으로 슬쩍 바꾸었고,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는 서울 동대문 바깥에 동묘(東廟)를 짓고 관우를 모셨다. 동묘는 지금도 남아 있다.



4) 우리는 치우천왕을 어떻게 숭앙하고 있는가.


위와 같이 ‘붉은 악마’ 응원단은 그 기회에 국민정신 계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단원 일부와 자원봉사인 일부가 경기장 바깥 어디에서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들었으나, 축구의 고위 관계자나 위정자, 국사학계, 정신문화계에서 치우천왕을 숭모하는 행사를 한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5) 중국에서의 치우천왕 숭앙


1.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건립되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치우천왕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제 헌원(皇帝 軒轅)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셔오다가 1980년대부터 염제 신농(炎帝 神農)을 황제와 함께 시조라고 내세우더니, 1990년대부터는 황제의 원수로 여기던 치우천왕을 끌어올려, 하북성 탁록현(河北省 鹿縣)에 ‘중화삼조당’이라는 거창한 건물을 5년에 걸쳐 짓고, 세 분을 그들의 조상으로 모셔 놓았다.


2. 치우천왕릉이 조성 중이다.

또 2002년 여름부터는 산동성 문상현(山東省 汶上縣)에 치우천왕의 무덤을 왕릉으로 조성하는 거창한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내 다양한 소수민족의 동화정책으로 중국국민통합정책의 일환이겠지만, 중국 국경내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중국의 변두리 역사로 간주하여 중국의 역사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6) 조상도 모르고, 역사를 잃고, 우리는 부끄럽다.

우리는 조상도 모르고 역사도 잃고 있으니,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이루 금할 수가 없다. 우리 정신문화계와 국사학계는 물론 위정당국은 시급히 대책을 세워서 우리 한겨레의 정신 앙양은 물론, 국민 정신통합과 사기진작에 힘써야 할 것으로 믿는다.




2002년 가을에


연재 적음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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